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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과 바다가 만나는 천혜의 자연경관  특색있고 매력있는 생태보존, 문화도시의 사하로 놀러오세요.

장림동  위치가 표시된 사하구 지도

장림동(長林洞)은 신평동과 마주보고 있으며, 안장림(內長林), 바깥장림(外長林), 보덕포(補德浦 : 보득포, 부득포, 버득포) 등의 3개 지역이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당초 바깥장림은 농업을, 안장림은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형태를 갖추고 반농반어의 취락형태를 이룬 조용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안장림과 바깥장림이 주택으로 이어졌으며, 원래는 안장림이 고래의 장림이었고, 바깥장림은 부산과 다대포간(多大浦間)의 도로개설 이후 도로변에 집들이 들어서서 생긴 마을이다.

보덕포는 안장림에서 아미산 줄기가 북쪽에 끝나는 능선을 넘어 낙동강 강가에 가면 응봉 봉수대의 북쪽 기슭에 있다. 영세농어민의 마을로 수십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보덕포에서 강안(江岸)을 끼고 작은 능선을 넘어 가파른 경사면을 내려가면 장대한 암벽(岩壁)이 있고, 그 밑에 강(江)을 향하여 입구가 있는 천연동굴이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채석작업으로 파괴되었으나, 선사(先史) 이래의 주거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굴은 석회암층이 강류(江流)의 침식(侵蝕)으로 용해되어 생긴 공동(空洞)으로 넓은 암반이 내려앉아 형성된 곳으로 50여명이 앉을 수 있을 만하고, 약 20도 정도의 경사진 암반이 바닥을 이루고 있다. 보덕포와 안장림 사이의 강변 구릉(丘陵) 위에 개간된 밭이 있고 그곳에서 기원 1세기경의 김해문화기의 토기편이 나오는 패총이 있었다. 규모는 작으나, 조사를 할 겨를도 없이 폐멸되었고, 그 성격은 건너편 신평동 패총과 같은 것이다. 고목(古木)이 서 있는 안장림 일대는 대부분 사빈(砂濱)지대로 모래와 자갈이 쌓여 이룩된 땅이다.

땅속에서 패각(貝殼)도 많이 나오며, 신라의 토기편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미산에서 보덕포에 이르는 강안(江岸)의 능선을 응봉(鷹峰)이라고 부르며 봉수대가 있었고, 독수리(鷹)의 서식처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독수리가 살고 있으며, 낙동강 하구의 철새들을 먹이로 하고 있다. 다대진(多大鎭)이 원래 장림동에 있다가 다대포(多大浦)로 옮겼다는 것은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 동래부지(東萊府誌), 문헌비고(文獻備考) 등에 확실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언제 지금의 다대포로 옮겼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진(鎭)이 다대로 옮기기 이전에 장림리의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지리적인 여건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장림동과 신평동 사이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이었다면 물의 깊이가 얕아 군항(軍港)으로는 적합치 않은 점도 있다.

장림의 옛 이름 중에 고다대(古多大)라고 전하는 말이 있는데, 신평동을 망후촌(望後村)으로 최근까지 불렀던 것을 보면 장림포(長林浦)의 위치와 규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장림포에 염분이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의 기록을 보면 장림포에서는 조선초에 이미 제염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바닷물을 졸여 소금을 만드는 가마가 있었고, 염세는 두지(斗地)마다 1양씩으로 정해져 해마다 4월까지 중앙의 균역청에 바쳤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따르면, 우리 수군(水軍)이 장림포 앞바다에서 왜선(倭船) 6척을 발견하고, 5척은 깨어 불살랐고, 1척을 불태운 뒤 낙오병의 목을 이몽구(李夢龜)가 베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숙종때에 명지만(鳴旨灣)에 표착(標着)하여 장림포에 내박(來泊)한 왜선 1척을 서평만호장(西平萬戶將) 이연정(李淵廷)이 사문(査問)했다는 기록이 보인 것을 보면, 장림포는 조선시대 군사상의 요지인 것은 틀림없다.

장림동은 그 후 한동안 낙동강 하구의 초라한 한촌(寒村)에 불과하였고, 영세 농어민들이 사는 한가로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나, 개항후 김(海苔) 생산지로서 그 명성을 날렸다. 해방전까지만 하여도 이곳에는 일본 사람들이 건너와서 김양식에 상당한 이익을 올렸었고, 이때부터 이곳 주민들의 생활수단이 되었다. 장림과 홍티(虹峠)에서 생산된 김을「장림 김」이라 하였고, 다 알아주는 특산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장림동에는 몇 채의 초가집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마루, 마당, 지붕위, 논밭 할 것 없이 새까맣게 김을 말리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가을이면 김을 팔러 나가거나 받아 나가는 아주머니들이 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줄지어 걷는 모습은 어촌의 낭만적인 정경이었다. 특히 장림김은 바닷물과 강물이 합쳐지는 곳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그 맛이 독특하여 부산 지방 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장림동에도 이주민이 많았다. 70년대 초에 부산시는 서구 남부민동과 중구 대청동을 잇는 산복도로를 뚫었는데, 그때에 집을 뜯긴 주민 가운데 1,400세대가 장림동으로 옮겨왔고, 대티터널 공사때 대티고개에 있던 불량주택이 뜯겨 그곳에 살던 360세대도 이곳으로 이사왔다. 집의 크기는 열 평 안팎이었고, 상수도 시설과 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안된 집들이었다. 또한 1981년도 신평ㆍ장림공단 조성사업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였으며 주택이나 토지값이 올랐고, 급기야 도시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83년도에 접어들면서 면적 4.26㎢의 광대한 면적에 6,341세대의 인구 30,077명을 수용하는 과대한 동으로 발전되었고 연평균 8.2%의 인구증가 추세로 당시의 인력과 장비로는 늘어나는 행정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민원사무에도 주민들의 불편을 초래하여 부산직할시 조례 제1864호로 장림동은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아미산의 능선과 장림진입로 및 장림삼거리에 장림초등학교를 포함하여 장림ㆍ신평공단도로(장림 137번지선)와 신평경계 지점을 동서로 분할하여 그 서쪽을 장림 제1동, 그 동쪽은 장림 제2동으로 1983년 10월 1일부로 분동하게 되었다.

한편 장림동과 구평동에는 1953년에 경상남도 지방에서 온 음성나환자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장림동에 1966년 3월 1일 장림초등학교가 설립되어 학교가 문을 열었을 때에 생겼다. 그때 마을 사람들의 기쁨은 대단하였으나, 부랑아 수용기관의 아동과 음성 나환자의 아동들이 문을 연 장림초등학교에 다니도록 한데서 마을 사람들과 대립이 있었다. 결국 당국에서는 일반 동민의 아동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수용기관의 아동은 수용기관(영아숙)안에서 공부를 시키기로 하였고, 음성 나환자촌에는 따로 분교장을 세워서 세 곳에서 교육을 실시하기로 하여 일단락 되었다.

장림동이 오늘과 같이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 것은 1981년부터 장림ㆍ신평의 넓은 땅을 한국토지개발공사에서 조성하여 많은 공장들이 이사를 오고, 정책 이주민들도 돈을 벌어 모아 좁은 땅이지만 새로 높은 집을 짓고, 상ㆍ하수도 시설을 갖추어 새로운 주택, 공업지대로 탈바꿈을 하였다. 길도 넓혀 포장을 하고, 장림에서 공업단지를 끼고 낙동강을 따라 하단까지 새로운 길도 뚫려 편리해진 장림동에 낙동강 강안(江岸)의 아름다운 시가(市街)로 변모해 가고 있는 마을이다.

장림동은 본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장림포라 하였는데, 고종 33년(1896)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장동, 외장동을 병합하여 장림동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는데,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구제 실시에 의하여 사하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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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업데이트
2024-01-10